소경된 사람들 (요한복음 9:1-2)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12절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볼 수 있게 한 이야기 입니다.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명의 소경을 볼 수 있게 하는 치유를 행하였으나 본문의 경우는 날 때부터 볼 수 있는 기능이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없던 시력을 만들어서 볼 수 있게 하신 예수님의 창조 사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며 또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지금도 창조 사역을 하시며 미래까지 쉬지 않고 창조 사역으로 그의 목적을 이루며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신 후 돌아 가는 길에서 소경이 구걸 하고 있는 모습을 제자들이 발견하였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소경은 자기가 걸어 가야 할 길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삶의 목표도 보지 못하니 목적 없이 살고 있으며 목적이 없으니 삶과 생명의 의미와 가치 없이 하루하루 임의대로 살아가면서 생명의 유지와 연장을 위하여 물질을 구걸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감각으로 살아가는 방황과 헤매는 길을 걸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경의 인생은 매일 물질을 찾아 온 마음을 쓰는 궁극의 목적이 없는 생명입니다.
이렇게 비참하고 목적 없이 방황하고 있는 소경이 생명연장만을 위한 물질을 요구하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면서 한가지 의문에 흥미를 가집니다. 보지 못하게 태어난 이유 입니다. 아버지의 죄 입니까? 자신의 죄 입니까? 제자들의 이 질문에는 그 원인을 알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 불행의 원인이 밝혀지면 그 소경의 불행과 고통은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나며 소경 아닌 자신들은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자기 정당함을 증명 받게 됩니다. 마음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 당시의 상식에는 부모의 죄거나 자신의 죄에서 불행과 불구와 병이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본문의 소경같이 처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배속에서 죄를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뱃속에서 동생 ‘야곱’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알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죄냐 자신의 죄냐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에게서 과거의 누구 책임은 보지 않으시고, 그의 소경 됨에서 받는 생명과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과 그것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역사(work)를 보고 계십니다. 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과거로 돌아가서 누구의 잘못을 찾아 책임 회피나 마음의 위안을 받고 그 자리에 머무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소경 됨에서 오히려 앞길을 찾으며 무엇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길을 제시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났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어 났으며 하나님의 일을 알고 그 소경 됨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즉 어떠한 환경이나 처지에서든 그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일에서, 고난이든 재난이든 그것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을 통하여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국면과 영적 생명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특히 고난 중에서 그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더욱 오늘 본문의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통하여 더욱 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리의 생명과 인생을 공허하거나 결과 없이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에서 벌써 우주가 생성 되기 전의 공허한 데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며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빛, 즉 목적과 의미를 주어서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또 다시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사람이 만든 종교에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찾아도 “무”라고 하니 비참하고 그 결과도 공허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4절 에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여야’ 라고 우리를 강조 하였습니다. 즉 내가 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 나의 과거만 보면서 더욱이 태어나기 전의 일을 상상하면서 그 탓으로 돌리고 미래로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5절에서 다시 한번 자신이 빛이며, 이 빛을 밤과 대조하여 낮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권면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만난 소경이 실로암 우물에 가서 예수님이 발라 준 눈 위의 흙을 예수님의 보내심에 복종하며 먼 길을 가서 씻음으로 볼 수 있게 됨과 같이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도 우리의 생명도 제한 되어 있고 예수님의 계심도 낮 동안 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 있는 존재 입니다. 한정된 생명 속에서 허용된 시간과 공간을 최대한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혹자는 죽고 나서 연옥에서 이루겠다 하지만 본문은 그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로암은 보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었을 때는 보지 못하는 불행이었거나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 일지라도 아무런 목적과 의미 없이는 세상에 보냄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소경 같이 예수님이 실로암으로 보내었을 때 예수님의 명령대로 그 물에 씻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키고 행하면 영적인 눈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볼 수 있게 되고 볼 수 있으면 먼 곳의 목표물도 보고 하나님이 주신 목적도 알게 되어 그 걸어가는 발 걸음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자기 나름 대로의 장애와 고난을 가지고 있으나 끝까지 담대히 걸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조명을 받아 나의 생명의 낮 동안 열심히 충성 되이 걸어 가면 하나님 주신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소경이 시력을 받고 나니 어떤 사람은 소경 거지인 그라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고 하듯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사탄의 유혹으로 새 길을 걷지 않는 사람과 그것을 이기고 새 길을 걸어가는 두 길이 있습니다. 빛을 준 자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주저 앉아서는 안됩니다. 그를 찾아가는 새 길을 걸어야 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면 어둠에서 나와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능력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아 예수님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